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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 후기, 그 마지막 5분에 대해 오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무비라이터 2026. 5. 14. 20:00

2016년 영화 라라랜드 공식 포스터,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 주연

2016년 영화 라라랜드 공식 포스터,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 주연

한 장면 때문에 영화관을 두 번 갔습니다

살면서 같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두 번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라라랜드(La La Land)는 두 번 갔습니다. 단 한 장면 때문에요.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춤추는 장면. 두 사람의 발이 바닥에서 떠올라 별빛 속을 부유하는 그 장면. 처음 영화관에서 봤을 때, 그 장면이 끝나고 한참 동안 멍하니 스크린만 봤습니다. 두 시간짜리 영화에서 5분 정도 되는 짧은 장면이었는데, 그 5분 때문에 영화 전체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집에 와서 며칠 동안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주일 후에 친구를 불러 영화관에 한 번 더 갔습니다. 그 장면을 다시 한번 큰 화면으로 보려고요. 그리고 신기한 건, 두 번째에는 그 장면 말고 다른 장면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은 그 한 장면에서 시작된 라라랜드 후기입니다. 분석적인 글이라기보다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마음에 박혔는지를 천천히 풀어보는 글입니다.

그리피스 천문대, 두 사람이 별 사이에서 춤출 때

미아와 세바스찬이 그리피스 천문대를 처음 함께 가는 장면. 영화 안에서 봐도 비현실적인 시퀀스인데, 두 사람이 별빛 사이를 떠다니며 왈츠를 추는 그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환상적인 순간입니다.

이 장면이 좋은 이유가 단순히 예뻐서가 아닙니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완전히 동등하게 행복한 순간이거든요. 영화 후반부의 모든 균열을 알고 다시 보면, 이 장면이 더 처연해집니다. 두 사람이 모두 꿈을 꾸고 있고, 서로를 응원할 수 있고, 아직 어떤 선택도 강요받지 않은 그 짧은 시간.

영화관에서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제 옆자리에서 누군가가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좋은 의미의 한숨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슬픈 종류의 한숨이요. 영화가 끝난 뒤에야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더 정확히 알게 됐습니다.

제가 두 번째 영화관에 갔을 때, 같이 간 친구가 이 장면이 끝나고 말했습니다. "이 장면, 분명히 영화 어딘가에서 다시 나올 것 같은데." 친구의 직감이 맞았습니다. 이 장면의 멜로디가 영화 마지막에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같은 곡인데 그때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됩니다.

세바스찬이 밴드에 들어간 그 결정에 대하여

라라랜드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춤추는 장면

라라랜드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춤추는 장면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정통 재즈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자기만의 재즈바를 차리는 게 꿈이고요. 그런데 영화 중반에 옛 친구가 운영하는 밴드에 합류합니다. 그 밴드의 음악은 세바스찬이 평소에 "진짜 재즈가 아니다"라고 비웃던 종류의 팝-퓨전이고요.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결정을 이해 못 했습니다. "왜 자기 신념을 꺾어가면서 저런 선택을 하지?"라고 답답해했어요. 영화 안에서 미아도 비슷한 표정을 짓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순간, 미아가 세바스찬에게 던지는 그 한마디 — "이게 정말 당신이 원하던 일이야?" — 가 너무 직설적이라 듣기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이 장면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세바스찬은 미아를 위해 그 선택을 했습니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는, 너무도 평범한 이유로요. 그리고 그 결정이 결국 두 사람을 멀어지게 만드는 시작점이 됩니다.

제 경험에 비춰봐도, 꿈과 생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옵니다. 누구도 처음부터 꿈을 포기하려고 그 선택을 하지는 않아요. 그저 "조금만 미뤄두자"고 자신을 설득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조금"이 쌓이면 어느새 자기가 누구였는지 잊어버립니다. 세바스찬이 거의 그 지점까지 갔던 거고요.

이 영화가 잔인한 건, 세바스찬의 선택을 "틀렸다"고 단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선택 덕분에 두 사람은 한동안 안정적으로 함께 지낼 수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시간이 미아의 꿈에도 도움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선택이 두 사람의 끝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결정이 이렇습니다. 좋기만 한 선택도, 나쁘기만 한 선택도 거의 없죠.

미아의 오디션, "꿈꾸는 바보들을 위하여"

영화 후반, 미아(엠마 스톤)가 마지막 오디션에서 노래로 자신의 이야기를 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Audition (The Fools Who Dream)"이라는 곡인데, 가사가 그녀의 이모 이야기로 시작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파리의 센 강에 맨발로 뛰어든 이모, 그래서 한 달 내내 감기에 걸렸지만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던 사람. 그 이모가 어린 미아에게 했던 말 — "꿈꾸는 사람들을 위하여, 비록 그게 부서질 운명이라도" — 이 노래의 핵심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처음 영화관에서 봤을 때 약간 울었습니다. 두 번째로 봤을 때는 더 많이 울었고요. 이 영화가 사실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꿈 이야기였다는 걸 이 장면에서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미아가 노래하는 동안 세바스찬은 그저 옆에 앉아서 듣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그 순간엔 알 수 없지만, 세바스찬이 미아의 꿈을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는 변하지 않습니다.

엠마 스톤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게 이 장면 하나 때문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겁니다. 노래 실력보다 그 표정과 떨림이 너무 진짜 같아서, 영화 안의 오디션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마지막 5분, 그 재즈바 장면이 모든 걸 바꿉니다

라라랜드 마지막 재즈바 장면, 미아와 세바스찬의 재회

라라랜드 마지막 재즈바 장면, 미아와 세바스찬의 재회

 

영화의 진짜 무게는 마지막 5분에 있습니다. 그 5분이 없으면 라라랜드는 그저 좋은 뮤지컬 영화에 머물렀을 겁니다.

5년 후. 미아는 결혼했고 아이도 있습니다. 배우로 성공했고요. 어느 날 저녁, 남편과 외출했다가 우연히 재즈바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게의 이름이 "Seb's"입니다. 세바스찬이 옛날에 미아에게 보여줬던 자신의 꿈의 이름. 그가 결국 자신의 재즈바를 차린 겁니다.

세바스찬이 무대 위에서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미아를 발견하고, 한참 동안 둘은 서로를 봅니다. 그리고 세바스찬이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 영화는 약 5분간의 환상으로 빠져듭니다.

이 5분이 라라랜드의 정수입니다. "만약 그때 그 선택이 달랐다면" 펼쳐졌을 또 다른 인생.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길을 걷고, 결국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평행 우주의 이야기. 음악, 색감, 안무 모든 게 영화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5분입니다.

제가 영화관에서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한참 동안 정리가 안 됐습니다. 그게 그저 환상이라는 걸 아는데도, 그 환상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 너무 슬펐거든요. 두 사람은 그 5분의 가능성을 모두 안 채로, 미소 한 번을 나누고 작별합니다. 미아가 남편 손을 잡고 가게를 나가기 직전, 세바스찬을 한 번 뒤돌아보고, 세바스찬이 그 시선을 받아 살짝 고개를 끄덕입니다.

대사 한 마디 없는 그 마지막 시선 교환이 이 영화의 진짜 결말입니다. "우리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너에게 일어난 좋은 일들이 다행이야"라는 마음을 두 사람이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게 그 짧은 순간에 전해집니다.

행복한 결말도 슬픈 결말도 아닙니다

라라랜드 세바스찬이 피아노로 City of Stars를 연주하는 장면

라라랜드 세바스찬이 피아노로 City of Stars를 연주하는 장면

 

라라랜드가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저는 그 질문 자체가 좀 단순하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의 결말은 둘 다이기 때문입니다.

미아는 배우로 성공했고, 세바스찬은 자신의 재즈바를 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꿈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함께는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꿈들이 가능했을지조차 모릅니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준 시기가 분명히 있었으니까요.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결말을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슬픈 영화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는 영화입니다. 보는 사람이 자기 인생의 어디쯤에 와있느냐에 따라 같은 결말이 다르게 읽힙니다.

저는 영화관에서 두 번 본 뒤로도 OTT로 두어 번 더 봤습니다. 볼 때마다 마음에 들어오는 장면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그리피스 천문대 장면이었고, 다음에는 미아의 오디션 장면이었고, 그 다음에는 마지막 5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영화 초반에 미아가 카페에서 일하면서 옆 테이블 손님들 대화를 듣는 짧은 장면 — 그 무명 시절의 외로움이 묘하게 와닿는 장면 — 이 가장 마음에 남았습니다.

라라랜드는 꿈을 응원하는 영화도, 사랑을 응원하는 영화도 아닙니다. 꿈을 향해 가는 길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상실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 상실이 곧 인생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이게 만드는 영화고요. 아직 한 번도 안 보셨다면 꼭 보시고, 한 번 보셨다면 한 번 더 보시기를 권합니다. 두 번째에는 다른 장면이 보일 거고, 세 번째에는 또 다른 장면이 보일 겁니다.

참고로 꿈과 예술, 그리고 그 사이의 갈등을 다룬 다른 영화들도 이 블로그에서 차차 다뤄볼 예정입니다. 비슷한 결의 영화 리뷰가 궁금하시다면 가끔 들러주세요.

 

※ 본 글에 사용된 영화 포스터 및 스틸컷의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으며, 비평·정보 제공 목적으로 인용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