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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타임(About Time) 후기, 아버지와 해변을 걷는 그 장면에 대하여

무비라이터 2026. 5. 13. 22:17

2013년 영화 어바웃 타임 공식 포스터, 도널 글리슨과 레이첼 맥아담스 출연

2013년 영화 어바웃 타임 공식 포스터, 도널 글리슨과 레이첼 맥아담스 출연

같은 영화를 세 번이나 본 건 이게 처음입니다

살면서 같은 영화를 세 번 이상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바웃 타임(About Time)은 어쩌다 보니 세 번을 봤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건 볼 때마다 마음에 남는 장면이 매번 달랐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는 개봉 무렵에 그냥 영화관에서 봤습니다. 그때는 어둠 속에서 만난 메리와 케이트 모스 전시회를 쫓아가는 장면들이 좋았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로 즐겁게 봤고, 결말에서 살짝 울었던 정도로만 기억합니다.

두 번째는 몇 년 후 OTT에서 우연히 다시 봤습니다. 그땐 팀과 메리의 결혼식,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아, 이 영화 가족 영화였구나"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세 번째는 작년이었습니다. 그때는 솔직히 한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팀이 아버지와 함께 해변을 걷는 장면.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영화가 끝난 뒤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영화는 같은데, 보는 사람의 시간이 영화 안의 시간과 겹쳐지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이 글은 그 세 번째 시점에서 다시 정리한 후기입니다.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로 알고 계셨던 분이라면, 이 영화의 다른 얼굴을 한 번쯤 봐주시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씁니다.

팀과 메리, 어둠 속에서 시작된 관계

어바웃 타임 팀과 메리가 만나는 장면

어바웃 타임 팀과 메리가 만나는 장면

 

팀은 스물한 살이 되던 날 아버지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듣습니다. 이 집안 남자들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 주먹을 쥐고 가고 싶은 시간을 떠올리면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평범한 영국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시간여행자가 되는 설정이지만, 영화는 이걸 거창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팀이 처음 이 능력을 쓰는 곳도 거창한 데가 아닙니다. 새해 파티에서 짝꿍한테 키스 한 번 더 해보려고, 누나 친구한테 좀 더 멋있게 보이려고. 그 사용처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더 좋습니다. 만약 이 능력이 저한테 생겼다면, 솔직히 저도 그런 데부터 썼을 것 같거든요.

팀과 메리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영화 초반의 백미입니다. 어둠 속에서만 식사할 수 있는 특별한 레스토랑에서, 두 사람은 얼굴도 못 본 채 대화하면서 서로에게 빠집니다. 볼 수 없으니까 목소리와 말에 더 집중하게 되는 그 설정 자체가 너무 영리합니다. 그리고 그게 두 사람 관계의 전체 톤을 결정짓습니다. 화려한 외모나 첫인상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인지가 먼저 보이는 관계.

팀이 시간여행 때문에 메리를 처음 만난 시점을 날려버리고, 결국 케이트 모스 전시회 오프닝까지 쫓아가서 그녀를 찾아내는 장면도 좋습니다. 운명이라는 게 어쩌면 우연을 두 번 세 번 시도하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비 효과, 시간여행의 진짜 비용

어바웃 타임 팀과 동생 킷캣의 가족 장면

어바웃 타임 팀과 동생 킷캣의 가족 장면

 

영화 중반, 팀의 동생 킷캣이 사고를 당합니다. 팀은 시간을 되돌려 동생의 불행을 막으려고 하는데, 여기서 이 영화의 진짜 잔인함이 드러납니다. 킷캣의 과거를 바꾸자, 팀과 메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사라지고 다른 아이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른바 나비 효과입니다. 작은 변화 하나가 멀리 떨어진 결과를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는 거죠. 시간여행 영화에서 이 개념이 등장하는 건 흔하지만, 어바웃 타임이 이걸 다루는 방식은 좀 다릅니다. 영화는 팀에게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합니다. 동생을 구할 것인가, 딸을 지킬 것인가.

저는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너무 멍해서 한참 화면만 봤습니다. 시간여행이 만능 도구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는 그게 아니라는 걸 잔인하게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는 건, 곧 모든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팀은 결국 딸을 선택합니다. 동생의 행복을 100% 보장할 수 없는 다른 방식을 찾아내야 하는 거죠. 시간여행이 있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게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느낀 건 단순합니다. 어떤 선택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시간여행이 가능한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면, 시간여행 없는 우리 일상에서는 더더욱 그렇겠죠. 누군가를 선택하면 다른 누군가는 포기해야 하는 게 인생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해변, 이 영화의 진짜 결말

어바웃 타임 팀과 아버지가 해변을 걷는 마지막 시간여행 장면

어바웃 타임 팀과 아버지가 해변을 걷는 마지막 시간여행 장면

 

이 영화의 진짜 결말은 사실 메리와의 사랑이 아닙니다. 아버지와의 작별입니다.

아버지(빌 나이)가 폐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팀은 시간여행으로 계속해서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영화의 결정적 장면. 팀과 아버지가 함께 어린 시절의 해변으로 돌아가, 그저 평범하게 모래사장을 걷는 그 장면. 대사도 거의 없습니다. 그냥 두 사람이 걷습니다.

저는 세 번째로 봤을 때 이 장면에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에는 그렇게까지 울지 않았는데, 세 번째에는 그게 안 됐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부모님이 한 살씩 더 늙는 모습을 봤고, 평범한 저녁 식사가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지를 조금씩 알아가던 시기였거든요.

팀은 셋째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면서 더 이상 아버지를 만나러 과거로 갈 수 없게 됩니다. 셋째가 태어난 뒤에 과거로 가면 셋째가 다른 아이로 바뀌어버리니까요. 아버지를 영영 떠나보내야만 자식을 지킬 수 있다는 그 설정이 너무 잔인합니다. 그리고 그 잔인함이 이 영화를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 이상으로 만듭니다.

제 아버지는 지금도 건강하시지만, 이 장면을 보고 나서 한동안 부모님께 더 자주 전화를 드렸습니다. 좋은 영화는 영화관을 나선 뒤의 행동을 바꿉니다. 어바웃 타임은 저에게 그런 영화였습니다.

팀이 결국 시간여행을 멈춘 이유

영화 마지막에 팀은 시간여행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능력이 사라진 게 아닙니다. 스스로 안 하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이게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결정입니다.

팀이 그 결정을 내리기 직전에 한 가지 실험을 합니다. 같은 하루를 두 번 살아보는 거죠. 처음에는 그냥 평범하게, 출근하고 일하고 사람들과 마주치며 그날을 보냅니다. 그리고 같은 하루로 다시 돌아가서, 이번에는 모든 순간을 의식적으로 바라봅니다. 같은 카페에서 같은 커피를 사도, 두 번째엔 바리스타의 미소를 보고, 햇빛이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봅니다.

이 실험의 결론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같은 하루라도, 의식해서 사는 하루는 완전히 다른 하루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팀은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어차피 한 번뿐인 하루를 두 번째 기회처럼 살면 되니까요.

이 결말이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가 말로 메시지를 던지지 않거든요. 팀이 직접 잃어보고, 직접 실험해보고, 직접 깨닫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도 같이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듣는 게 아니라 같이 경험하는 거죠.

이 영화를 보고 생긴 작은 버릇 하나

세 번째로 영화를 본 다음 날, 출근길에 작은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걷다가 가끔 멈춰서 주변을 한번 둘러보는 것. 거창한 명상 같은 건 아니고, 그냥 5초 정도 가만히 서서 하늘이나 가게 간판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며칠 하니까 그게 꽤 좋더라고요. 매일 지나가는 길에 그렇게 많은 것들이 있었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어바웃 타임이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이 이런 거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여행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어쩌면 그게 시간여행 없이 시간여행을 흉내 내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바웃 타임은 로맨스 영화로 시작해서, 가족 영화로 흘러가고, 인생관에 대한 영화로 끝나는 작품입니다. 한 번 보면 로맨틱 코미디, 두 번 보면 가족 드라마, 세 번 보면 그냥 인생 영화가 됩니다. 아직 한 번도 안 보셨다면 한 번 보시고, 한 번 보셨다면 다시 보시고, 두 번 보셨다면 한 번 더 보세요. 볼 때마다 다른 장면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참고로 시간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영화 중에 함께 보면 좋은 작품들이 꽤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차차 그런 영화들도 다뤄볼 예정이니, 비슷한 결의 영화 리뷰가 궁금하시다면 가끔 들러주세요.

 

※ 본 글에 사용된 영화 포스터 및 스틸컷의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으며, 비평·정보 제공 목적으로 인용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