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영화 인턴(The Intern) 공식 포스터, 로버트 드 니로와 앤 해서웨이 주연
가벼운 직장 코미디인 줄 알았던 영화
솔직히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는 가벼운 직장 코미디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70세 노인이 스타트업에 인턴으로 들어간다"는 설정 자체가 좀 만화 같았거든요. 어색한 상황을 가지고 웃기다가 훈훈하게 끝나는, 그런 류의 영화일 거라고요.
제가 이 영화를 본 건 평일 저녁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좀 힘든 한 주를 보낸 뒤라, 가볍게 머리 식힐 영화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OTT에서 평이 좋다는 이 영화를 골랐습니다. 영화 시작 30분쯤은 예상대로였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가 70세의 단정한 신사로 등장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움직이는 장면들이 분명히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영화 중반 즈음부터 톤이 미묘하게 바뀌더라고요. 벤이라는 캐릭터가 단순한 코믹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줄스라는 CEO 캐릭터도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복잡한 인물이었어요.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제가 처음에 기대했던 가벼운 코미디는 사라지고, "일을 한다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꽤 묵직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이 글은 그날 밤 영화를 다 보고 한참 동안 정리되지 않던 마음을 적어둔 글입니다. 가벼운 영화로만 기억하고 계신 분이라면, 한 번 더 천천히 보시기를 권하고 싶어서요.
70세 인턴 벤, 정장과 손수건과 단정함

영화 인턴 벤 휘태커가 스타트업 사무실에 첫 출근하는 장면
은퇴한 70세 신사 벤(로버트 드 니로)이 스타트업 의류 쇼핑몰 "About The Fit"에 시니어 인턴으로 합격합니다. 첫 출근 날, 벤은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깔끔하게 다린 손수건을 가슴 주머니에 꽂은 채 사무실에 들어옵니다.
이 사무실의 직원들은 거의 다 20~30대고, 청바지와 후드티 차림이에요. 벤의 정장이 사무실 안에서 너무 튑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정장이 점점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시대 차이가 아니라, 일을 대하는 한 사람의 태도 같은 것으로요.
벤의 첫 며칠은 사실 좀 비참합니다. 아무도 그에게 일을 주지 않습니다. 줄스 본인의 인턴이라고 배정받았는데, 정작 줄스는 그가 자기 옆에 있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벤은 며칠 동안 그저 자기 자리에서 단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에요.
제가 이 부분을 보면서 정말 인상 깊었던 게 있어요. 벤은 그 상황에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어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단정하게 있습니다. 그러다 동료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손을 보탭니다. 책상 위 쓰레기를 치우고, 정리되지 않은 서류 더미를 정돈하고, 점심시간에 음식을 잘못 주문한 동료의 식사를 자기 것과 바꿔주는 식으로요.
이게 벤이 직장에서 자기 존재를 만드는 방식이었어요. 가르치려 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그저 옆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합니다. 영화가 한 30분쯤 흘렀을 때, 사무실의 모든 동료가 자연스럽게 벤에게 인생 상담을 하러 오기 시작합니다. 벤은 가만히 듣고, 짧게 한두 마디 던지고, 그게 또 그렇게 정확합니다.
제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선배들이 사실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큰 소리 내지 않고, 자기 자랑하지 않고, 그저 자기 자리에서 일을 잘하면서 옆 사람을 돕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회사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람이 됩니다. 벤이 영화 안에서 빠르게 모두의 신뢰를 얻는 게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아요. 진짜 그런 분들이 있거든요.
잘 나가는 줄스, 그 이면의 균열

영화 인턴 줄스 오스틴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장면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은 창업 1년 반 만에 직원 220명 규모로 성장한 의류 쇼핑몰의 CEO입니다. 자기 자전거를 타고 사무실 안을 누비고, 모든 디테일을 직접 챙기고, 콜센터에 직접 출몰해서 응대 방식을 점검하는 그런 CEO예요.
처음 줄스를 봤을 때는 좀 거리감이 들었습니다. 너무 추진력이 강하고, 옆 사람을 못 보고 살아가는 인물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줄스가 흔들리는 순간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투자자들은 줄스에게 외부 CEO를 영입하라고 압박합니다. 회사가 너무 빠르게 성장해서 줄스 혼자 운영하기 어려우니, 전문 경영자에게 일부 권한을 넘기라는 거예요. 명목상 좋은 제안처럼 들리지만, 줄스에게는 그게 자기 회사를 잃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자기가 직접 디자인부터 포장까지 챙겨온 브랜드인데, 갑자기 누구한테 맡기라니요.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 남편 맷이 일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가 된 상황에서, 부부 사이가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줄스가 늦게까지 일하느라 딸 학교 행사에 못 가고, 다른 엄마들과의 관계도 어색해지고, 집에 돌아오면 남편과 대화할 에너지도 남지 않습니다.
이 줄스라는 캐릭터가 흥미로운 게, 앤 해서웨이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연기한 앤디의 미래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미란다를 떠나 자기 길을 찾아간 앤디가 10년 후에 어떻게 됐을지를 보여주는 듯한 인물. 자기가 만든 브랜드를 지키고 있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종류의 압박을 받고 있는 사람.
제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한 가지가 있어요. 성공한 사람들은 보통 더 조용하게 흔들립니다. 신입 때는 힘들면 친구에게 털어놓고 우는 게 가능한데, 어느 정도 위치가 올라가면 그게 어려워져요. 직급이 높아질수록 약한 모습 보일 곳이 줄어듭니다. 줄스가 영화 안에서 보여주는 그 외로움이 정말 진짜처럼 보였어요.
벤이 줄스에게 해준 진짜 한 가지

영화 인턴 벤과 줄스가 마주 앉아 대화하는 장면
영화의 진짜 핵심은 벤과 줄스가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가 좋은 이유는 벤이 줄스에게 인생 조언을 해주거나, 큰 위로를 건네서가 아니에요.
벤이 줄스에게 해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판단 없이 옆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줄스가 늦은 밤 호텔 방에서 술을 마시면서 남편 문제를 털어놓을 때, 벤은 해결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듣습니다. 줄스가 CEO 영입 문제로 흔들릴 때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하라는 식의 충고가 아니라, 그저 곁에 있어 줍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어요. 줄스가 호텔 방에서 벤의 어깨에 잠시 기대는 짧은 순간입니다. 로맨스가 아니에요. 그저 한 사람이 너무 지쳐서 잠깐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했고,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어깨를 자연스럽게 빌려준 그런 장면이요. 이게 사실 인생에서 정말 귀한 종류의 관계입니다. 어떤 관계는 큰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저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벤이 회사에서 자기 자리를 만드는 방식과, 줄스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같다는 게 영화의 흥미로운 점이에요. 두 가지 모두 "옆에서 묵묵히 있는다"는 같은 방식입니다. 그게 직장이든 인간관계든, 벤은 항상 같은 자세를 유지합니다.
제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도움이 됐던 선배들도 사실 이런 분들이었어요. 큰 조언을 해준 사람이 아니라, 내가 힘들 때 점심 한 끼 같이 먹어준 사람. 위로의 말이 아니라 그저 함께 있어 준 시간이 결국 더 오래 남습니다. 영화가 그걸 정확히 짚어준 게 좋았어요.
남편 맷의 그 한 마디, 줄스가 끝내 지킨 것
영화 후반부에 충격적인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벤이 우연히 줄스의 남편 맷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외도로 보이는 상황이에요.
이 시점에서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좀 걱정됐습니다. 보통 이런 설정이면 줄스가 분노하고, 큰 부부 싸움이 벌어지고, 극적인 화해나 이별로 이어지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가지 않습니다.
벤은 그 사실을 알고도 줄스에게 바로 말하지 않습니다. 며칠 동안 혼자 그 무게를 안고 있어요. 이 부분이 정말 어른의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남의 가정에 대한 정보를 함부로 옮기지 않는 것, 본인이 아는 게 정말 사실인지 다시 한 번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말할 때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 벤은 그 모든 것을 천천히 합니다.
결국 줄스가 사실을 알게 되고, 영화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보여줍니다. 맷이 줄스에게 말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잠시 혼란스러웠어." 변명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인데, 영화가 그걸 변명으로 그리지 않아요. 줄스가 일에 빠져 있는 동안, 자기 정체성을 잃은 한 사람의 솔직한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줄스의 선택이 정말 좋았습니다. 줄스는 외부 CEO 영입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회사 운영에서 한 발 물러서면 가족에게 더 많은 시간을 줄 수 있으니까요.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선택이 사랑을 위한 희생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까 영화는 그 결정에서 또 한 번 비틀어요. 벤이 줄스에게 말합니다. "네가 만들어낸 것을 네 손으로 무너뜨리지 마. 그래야 남편도 결국 너를 잃지 않아." 줄스는 이 말을 듣고 결국 외부 CEO 영입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남편 맷도 줄스의 그 결정을 결국 받아들입니다.
이 결말이 좋은 이유가 있어요. 줄스가 사랑을 위해 일을 포기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킨 채로 관계를 회복하기로 한 거예요. 한쪽이 자기 자신을 다 내려놔야만 유지되는 관계는 결국 무너집니다. 벤이 줄스에게 그걸 정확히 짚어준 거고, 줄스가 그 한 마디 덕분에 자기를 지킬 근거를 찾은 겁니다.
잘 나가는 사람도 옆에 누군가가 있기를 바란다
영화 인턴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잘 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누군가 그냥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줄스는 외부에서 보면 모든 걸 가진 사람이에요. 성공한 사업, 아름다운 집, 좋은 남편, 사랑스러운 딸. 그런데 그 모든 걸 가진 줄스가 가장 필요했던 건 비싼 컨설팅도, 명언 같은 조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 옆에서 판단 없이 들어주는 한 사람이었어요.
제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의 가치를 더 알게 된다는 것. 신입 때는 친구가 많고,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도 쉽고, 그래서 그 관계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직급이 올라가고 책임이 늘어날수록, 그저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정말 귀해져요.
이 영화는 그래서 단순한 직장 영화가 아닙니다.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영화예요. 벤이 직장에서 자기 자리를 만드는 방식과, 줄스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똑같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일도 사람도 결국 같은 자세로 대하는 것.
가볍게 보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보고 나서 한참 정리가 안 됐던 영화입니다. 지금 직장에서 어떤 상사를 만나야 할지 모르겠는 분, 또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고민하시는 분께 권합니다. 거창한 가르침은 없지만, 좋은 어른의 모습을 한 명 보여주는 영화예요. 그 모습이 꽤 오래 남을 거예요.
참고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이 블로그에서 종종 다루고 있습니다. 비슷한 결의 영화 리뷰가 궁금하시다면 가끔 들러주세요.
※ 본 글에 사용된 영화 포스터 및 스틸컷의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으며, 비평·정보 제공 목적으로 인용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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