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영화 줄리 앤 줄리아 공식 포스터, 메릴 스트립과 에이미 아담스 주연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손이 멈춘 장면
솔직히 처음엔 요리 영화라길래 그냥 가볍게 흘려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면 속 줄리가 블로그에 첫 글을 올리는 장면을 보는 순간, 제 손이 멈췄어요.
저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꿈은 있는데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 같은 그 막막함이 화면 밖까지 전해졌거든요. 빈 화면에 첫 글을 올리고, 그게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지만 아무 반응이 없는 그 시간. 그 감각을 저도 알고 있어서, 줄리가 화면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제 모습 같았습니다.
줄리 앤 줄리아(Julie & Julia, 2009)는 단순한 요리 영화가 아니에요.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사람, 특히 그 시작이 너무 작고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봐야 할 영화입니다.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버티는가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이 글은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 후기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했는데 자꾸 막막하게 느껴지시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어떤 위로를 주는지 함께 정리해보고 싶어요.
두 여자, 두 시대, 한 번도 만나지 않는 두 이야기

영화 줄리 앤 줄리아 줄리아 차일드가 파리에서 요리하는 장면
영화는 두 개의 시간대를 번갈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1949년 파리에서 요리에 눈을 뜨는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의 이야기와, 반세기 뒤인 2002년 뉴욕에서 블로그를 시작하는 줄리 파월(에이미 아담스)의 이야기예요.
두 사람은 영화 안에서 한 번도 만나지 않습니다. 50년의 시간차가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두 사람은 화면 안에서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줄리는 줄리아의 요리책을 따라 요리를 하고, 줄리아는 줄리가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이거든요.
줄리아 차일드는 실존 인물이에요. 미국에 프랑스 요리를 대중화시킨 전설적인 요리 연구가입니다. 그녀가 쓴 요리책과 TV 방송이 미국 가정의 식탁을 바꿔놓았어요. 영화는 그녀가 파리에서 요리를 처음 배우던 시절부터, 그 유명한 요리책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줄리 파월도 실존 인물입니다. 2002년 뉴욕에 살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에 있는 524개의 레시피를 1년 안에 모두 만들어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과정을 블로그에 기록했어요. 그 블로그가 화제가 되면서 책으로 출판됐고, 결국 이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거예요.
영화가 이 두 사람을 나란히 놓는 방식이 좋아요. 두 사람의 공통점이 천천히 드러나거든요. 처음에는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다는 것, 각자의 방식으로 좌절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묵묵히 기록했다는 것. 시대도 상황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사실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게 영화가 끝날 때쯤 분명해집니다.
줄리아 차일드, 열정에 매일의 루틴을 더한 사람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줄리아의 요리학교 입학 장면이었어요. 1949년 파리,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문가 과정 진입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굴하지 않고 밤낮으로 칼질을 연습합니다.
집에서 양파 한 자루를 사다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끝없이 양파를 썰어요.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썰기 위해서요. 그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열정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 열정은 방향이 없으면 금방 소진돼요.
줄리아가 달랐던 건 열정에 매일의 반복이 있었다는 점이에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연습을 반복하는 것. 그게 재능보다 중요하다는 걸 영화가 조용히 보여줍니다. 줄리아는 천재적인 요리사로 그려지지 않아요. 그저 남들보다 더 오래, 더 꾸준히 연습한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 위로가 됐어요. 저도 글을 쓰면서 비슷한 걸 느끼거든요. 한 번에 좋은 글이 나오는 게 아니라, 매일 조금씩 쓰는 게 쌓여서 어느 순간 나아지는 거예요. 거창한 영감보다 매일의 반복이 결국 사람을 만든다는 것. 줄리아가 양파를 써는 그 장면이 그걸 말해줘요.
그리고 그녀가 동료들과 함께 요리책을 집필하는 과정도 인상적이에요. 그 유명한 요리책이 완성되기까지 무려 8년이 걸렸습니다.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고, 너무 길다는 이유로 원고가 반송되고, 파리를 떠나 여러 곳을 이사하면서도 그녀는 그 원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영화는 그 8년의 시간을 두 시간 안에 압축하면서도 그 무게를 잃지 않습니다.
줄리 파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계속 쓰는 사람

영화 줄리 앤 줄리아 줄리 파월이 부엌에서 요리하며 블로그를 쓰는 장면
줄리 파월의 이야기는 줄리아와는 정반대 톤으로 시작해요. 그녀는 처음부터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콜센터 비슷한 곳에서 민원을 받는 직장인이에요. 매일 사람들의 불평을 듣고, 자기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고 있어요.
영화 초반에 줄리가 동창 모임에 나가는 장면이 있어요. 잘나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만 별 볼 일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 장면. 친구들은 다 성공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데, 줄리는 자기가 하는 일을 설명하기도 민망해해요. 저는 이 장면이 정말 아팠어요.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감각이잖아요.
그러다 남편의 제안으로 블로그를 시작합니다.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에 있는 524개의 레시피를 1년 안에 다 만들고, 그 과정을 매일 블로그에 기록하겠다는 목표를 세워요. 처음에는 아무도 그 블로그를 읽지 않아요. 댓글도 없고, 방문자도 없습니다. 그냥 빈 공간에 혼자 글을 올리는 거예요.
제가 이 부분에서 가장 깊게 공감했어요. 저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똑같은 시간을 보냈거든요. 글을 올려도 아무도 안 읽는 시간. "이걸 계속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 시간. 줄리가 정성껏 요리를 하고 글을 썼는데 조회수가 0인 화면을 보는 그 장면이, 제 경험과 너무 겹쳤어요.
그런데 영화가 이 시간을 비장하게 그리지 않아요. 그냥, 줄리는 오늘도 요리를 하고, 글을 씁니다. 큰 결심이나 극적인 다짐 없이, 그저 어제 했던 걸 오늘도 하는 거예요.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현실적인 부분이에요. 무언가를 시작한 사람의 진짜 어려움은 거창한 좌절이 아니라, 아무 반응 없는 매일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거든요.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영화 인턴과도 닿아 있어요. 두 영화 모두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인턴이 이미 인생을 살아온 노인의 시선이라면, 줄리 앤 줄리아는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의 시선이에요. 두 영화를 함께 보면 일과 인생에 대해 다른 두 각도를 얻게 됩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꿈을 좇는 일의 지루함
보통 "꿈을 향한 도전"을 다룬 영화는 고난과 극복의 공식을 반복해요. 주인공이 큰 시련을 겪고, 그걸 극적으로 이겨내고, 화려하게 성공하는 식이죠. 그런데 줄리 앤 줄리아는 그 공식에서 벗어납니다.
이 영화의 절반 이상은 "버티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어요. 출판사에서 거절당하고, 약속이 취소되고, 상사에게 불려가고, 블로그를 올렸는데 아무도 안 읽고. 이런 작고 반복적인 좌절들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극적인 사건은 거의 없어요.
저도 처음엔 이게 좀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언제 성공하지? 언제 빛을 보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되돌아보니, 그 답답한 부분이 가장 현실적이었어요. 진짜 도전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매일 똑같이 반복하고,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고, 그래도 그냥 계속하는 것.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메시지가 바로 이거예요. 꿈을 좇는 일은 사실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 오히려 지루하고 반복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지루함을 견디는 사람이 결국 어딘가에 도달한다는 것. 줄리아도, 줄리도, 둘 다 그 지루한 시간을 견딘 사람들이에요.
한 가지 더 마음에 남는 게 있어요. 두 사람 모두 성공의 계기는 외부에서 왔지만, 그 시간을 버틴 건 본인이었다는 점이에요. 줄리아는 출판사를 만나기까지 8년을 버텼고, 줄리는 블로그가 화제가 되기까지 아무도 안 읽는 시간을 버텼어요. 누가 발견해주기 전까지, 그 시간을 채운 건 결국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 흉내가 아니라 에너지의 흡수
이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따로 언급이 필요할 정도예요. 그녀가 연기한 줄리아 차일드는 실존 인물이고, 특유의 높고 들뜬 목소리와 큰 키, 활기찬 몸짓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메릴 스트립은 그 목소리와 몸짓을 완벽하게 구현해요. 그런데 단순히 흉내만 내는 게 아니에요. 줄리아 차일드라는 사람이 가진 에너지 자체를 흡수한 것처럼 보입니다. 요리를 할 때의 즐거움, 새로운 것을 배울 때의 호기심, 좌절했을 때도 금방 다시 일어나는 그 낙천성. 그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실제 줄리아 차일드의 옛 방송 영상을 찾아봤어요. 그리고 메릴 스트립이 얼마나 정확하게 그 에너지를 잡아냈는지 알고 놀랐습니다. 흉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되어버린 수준이었어요. 그게 메릴 스트립이 왜 그렇게 위대한 배우로 불리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에요.
에이미 아담스의 줄리 연기도 좋아요. 메릴 스트립의 화려한 에너지와 대비되게, 에이미 아담스는 더 작고 더 흔들리는 사람을 연기합니다. 자신감이 없고, 자주 무너지고, 그래도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사람. 두 배우의 이 대비가 영화의 두 시간대를 자연스럽게 이어줍니다.
한 가지 알고 보면 더 뭉클한 사실이 있어요. 이 영화는 노라 에프론 감독의 마지막 연출작이에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같은 명작 로맨틱 코미디를 만든 감독인데, 줄리 앤 줄리아를 끝으로 201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 실제 인물인 줄리 파월도 2022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두 사람이 모두 떠난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어딘가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무언가를 끝까지 해낸 사람들이 남긴 기록처럼요.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는 영화
줄리 앤 줄리아는 화려한 영화가 아니에요. 큰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습니다. 그저 두 여성이 각자의 시대에서 무언가를 묵묵히 해나가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단순한 구조가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가장 추천드리고 싶은 분은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은데 자꾸 엄두가 안 나는 분이에요. 블로그를 시작하고 싶은데 아무도 안 읽을까 봐 두려운 분, 새로운 일을 배우고 싶은데 너무 늦은 것 같은 분, 꿈은 있는데 그 꿈이 너무 멀어 보이는 분.
이 영화가 그런 분들께 주는 메시지는 단순해요.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계속 해나가는 것이 결국 인생을 바꾼다는 것. 줄리아도 줄리도 천재가 아니었어요. 그저 매일 했을 뿐이에요. 양파를 썰고, 요리를 하고, 글을 쓰고. 그 평범한 반복이 두 사람을 결국 어딘가로 데려갔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이 영화가 특히 위로가 됐어요. 아무도 안 읽는 글을 계속 올리는 시간이 의미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영화가 알려줬거든요. 줄리도 그 시간을 거쳤고, 결국 그 시간이 그녀를 작가로 만들었어요. 지금 당장 빛이 안 보여도, 매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가장 따뜻한 위로입니다.
요리 영화를 좋아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건 요리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는 사람에 대한 영화니까요. 조용하고 따뜻하게, 오늘 하루를 계속하는 일의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한 번 꺼내 보시기를 권합니다.
참고로 일과 도전, 자기 성취를 다룬 영화들을 이 블로그에서 종종 다루고 있습니다. 비슷한 결의 영화 리뷰가 궁금하시다면 가끔 들러주세요.
※ 본 글에 사용된 영화 포스터 및 스틸컷의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으며, 비평·정보 제공 목적으로 인용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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